프란츠 리스트가 뵈젠도르퍼를 연주하는 모습


콘서트가 열렸던 그 밤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격정적인 연주로 유명했던 젊은 거장 프란츠 리스트는 그날 밤 이후 뵈젠도르퍼로 가장 위대한 연주를 들려준 최초의 피아니스트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사실 그날 밤이 있었기에 뵈젠도르퍼의 성공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뵈젠도르퍼 피아노 구성


현재 뵈젠도르퍼 공장에서는 155~255 cm 크기의 그랜드 피아노 6종, 콘서트용 그랜드 피아노 2종 280VC와 290 Imperial, 업라이트 피아노 2종 Grand Upright 120 & 130을 생산합니다. 모든 모델이 전설적인 뵈젠도르퍼의 DNA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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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이그나츠 뵈젠도르퍼와 그의 아들 루드비히 뵈젠도르퍼

피아노. 포르테. 다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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뵈젠도르퍼 설립자, 이그나츠 뵈젠도르퍼의 초상화

이그나츠 뵈젠도르퍼
(1794~1859)


이그나츠 뵈젠도르퍼는 1794년 목공업자였던 야콥 뵈젠도르퍼와 마르타 뵈젠도르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살이 되던 해에 당시 가장 유명했던 피아노 제조업자인 요제프 브로드만(1763~1848)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재능 많았던 젊은 청년 이그나츠는 1815년에 이미 비엔나 예술대학에서 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비엔나에는 나네테(Nanette), 요한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Johann Andreas Streicher), 요한 샨츠(Johann Schantz), 안톤 발터(Anton Walter), 콘라드 그라프(Conrad Graf), 마이클 슈바이크회퍼(Michael Schweighofer) 등의 많은 유명 피아노 제조사들이 있었습니다. 문하생 시절 많은 지식과 기술을 쌓은 이그나츠 뵈렌도르퍼는 1828년 65세의 나이로 은퇴한 요제프 브로드만으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았습니다.

1828년 7월 25일, 비엔나


프란츠 슈베르트가 비엔나에서 베토벤 옆에 묻혔던 1828년 7월 25일, 이그나츠 뵈젠도르퍼는 정식으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소재한 제조업자 길드에 가입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습니다. 이 날은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던 프리미엄 피아노 제조사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아 감동적인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는 뵈젠도르퍼의 공식적인 설립일입니다. 창업 초기 이그나츠가 투자한 500 굴덴은 그가 1859년 세상 떠나면서 아들 루디비히에게 회사를 넘겨 주었을 때 그 가치가 145,000 굴덴으로 상승했을 만큼 그의 투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뵈젠도르퍼를 연주하는 프란츠 리스트



1838년, 비엔나: 젊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프란츠 리스트의 격정적인 연주를 버텨낼 피아노가 없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리스트는 친구들의 추천을 받아 비엔나 연주회에서 뵈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를 선택했습니다. 리스트는 뵈젠도르퍼의 뛰어난 제작 기술과 품질의 도움으로 자신의 예술혼을 맘껏 표출했고, 청중은 크게 감동했습니다. 이 일로 뵈젠도르퍼는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지고 이후 많은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리스트와 뵈젠도르퍼의 가까운 친분 관계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비엔나 비더마이어” 시대에는 피아노를 연주용 악기가 아니라 가정에서 여가를 보낼 때 사용하는 악기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이 당시 비엔나는 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다소 억압적인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교 생활은 비공개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술가들과 작곡가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상류층에게 즐거움을 주는 개인 살롱과 특권층 모임들이 이 때 다수 열렸습니다. 이중 가장 유명 사교 모임은 슈베르트의 이름을 딴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s)입니다. 피아노는 모임이 열리는 살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음악과 즐거움, 오락거리를 제공하던 피아노 제조업체가 387개나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뵈젠도르퍼가 설립된 1828년, 뵈젠도르퍼는 피아노 4대를 수작업으로 제작했지만 1835년에는 총산량이 200대까지 늘어났습니다. 1839년, 오스트리아 황제는 이그나츠 뵈젠도르퍼를 “황실 및 왕실 전담 피아노 조달업체”로 공식 지정했습니다. 피아노 장인으로서 이런 영예 안은 것은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뵈젠도르퍼는 많은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얼마 후 이그나츠 뵈젠도르퍼는 프란츠 리스트, 안톤 루빈스타인과 친교를 맺으면서 독일,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브라질, 이집트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뵈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자 그는 공장을 새로 지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완공된 공장의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1859년 사망한 이그나츠 뵈젠도르퍼는 솜씨가 좋았던 아들 루드비히에게 공장을 물려주었습니다. 비엔나의 음악 애호가들은 모두 이그나츠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뵈젠도르퍼의 완벽성은 내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루드비히 뵈젠도르퍼
(1835~1919)


루드비히 뵈젠도르퍼는 1835년 4월 10일 출생으로,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전수 받았을 뿐만 아니라 비엔나 제국 공과대학에서도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전수받은 노하우는 나중에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1860년, 루드비히는 새 액션을 발명하고, 1862년에는 “Patent Grand”로 외국인 최초로 런던에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1867년에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루드비히가 만든 피아노의 성공과 아름다운 디자인에 매료된 오스트리아의 “씨시” 엘리자벳 황후는 프랑스의 외제니 황후에게 뵈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를 선물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피아노는 무지크페어인(Musikverein)과 오스트리아 의회를 지은 비엔나의 유명 건축가 테오필 한젠(Theophil Hansen)이 설계했습니다. 뵈젠도르퍼의 명성은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전 세계로 퍼져 뵈젠도르퍼는 싱가포르, 리오, 스톡홀름, 도쿄까지 수출되었습니다.

1870년, 뵈젠도르퍼는 비엔나 제4지구 그라프 슈타렘베르크가쎄 14의 건물을 매입합니다. 그리고 사무실과 쇼룸은 비엔나 도심의 헤렌가쎄 6번가, 팔레 리히텐슈타인으로 옮깁니다. 루드비히는 Art of the Piano 소속 장인으로서 음악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1872년 11월 19일, 이전에 경주마용 마구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의 음질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리스트의 사위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는 팔레 리히텐슈타인에 뵈젠도르퍼 홀을 개관합니다. 이후 이곳에서 40년 동안 즐거움과 예술적 가치 모두를 모두 지닌 많은 피아노 연주회와 실내악 연주회 및 발표회가 열렸습니다. 초기에는 루드비히 뵈젠도르퍼의 주관으로 약 4,000회의 연주회가 열렸고, 빌헬름 박하우스, 페루치오 부조니, 유진 달베르(1886년 비엔나 초연), 빌헬름 키엔젤, 프리츠 크라이슬러, 테오도르 레셰티츠키, 프란츠 리스트, 구스타프 말러, 소피 멘터, 이그나치 파데레프스키(뵈젠도르퍼 홀 무대에서 자주 공연), 막스 레거, 안톤 루빈스타인, 파블로 사라사테, 에밀 폰 사우어, 아르투르 슈나벨, 리하트르 스트라우스, 에르뇌 도흐나니, 후고 볼프 등의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가졌습니다. 뵈젠도르퍼 홀은 비엔나 음악과 예술의 촉매제이자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뵈젠도르퍼는 피아노를 제공하여 연주회를 지원했을 뿐 아니라 음악과 예술의 발전에도 기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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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앞에서 뵈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는 루드비히 뵈젠도르퍼

1833년 뵈젠도르퍼의 연간 피아노 생산량은 288대로 증가하고, 뵈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는 귀족과 황제, 유럽 엘리트(엘리자벳 황후, 폴린 메테르니히, 슈테파니, 발레리 여대공, 카타리나 슈라트, 외겐 대공,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 일본 천황)뿐 아니라 예술가들의 마음도 사로잡았습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여름 공연에 항상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요청했고, 요한 스트라우스는 비엔나 프라터슈트라쎄에 위치한 아파트에 뵈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를 들여 놓았고, 구스타프 말러는 학창 시절 뵈젠도르퍼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항상 최신 기술에 호기심이 많았던 루드비히는 기술 이사인 프란츠 버거와 비엔나식 액션을 만들고 여러 가지 발명품의 특허를 냈습니다. 1900년경 바흐의 유명한 오르간 곡을 편곡하던 이탈리아의 작곡가 페루치오 부조니(Ferruccio Busoniis)가 아주 특별한 피아노의 제작을 의뢰하였습니다. 루드비히는 설계 의뢰를 수락하고 최초의 뵈젠도르퍼 Concert Grand 290을 제작했습니다. 이 모델은 이후 Imperial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집니다. 이 모델은 8옥타브의 음역대를 보유하고 필요한 경우 저음을 추가할 수 있으며 특히 오케스트라 사운드 경험을 제공합니다. 루드비히 뵈젠도르퍼는 혁신과 꾸준한 개발을 통해 독창적인 엔지니어링 기술과 품질을 브랜드 이름에 성공적으로 접목하고, 뵈젠도르퍼는 완벽한 디테일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뵈젠도르퍼가 제작하고 안톤 그로서가 디자인한 피아노

루드비히 뵈젠도르퍼는 두 번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1909년 친구인 칼 후터스트라세(Carl Hutterstrasser)에게 공장을 팔기로 합니다. 은행가였던 칼은 피아노 제조업자는 아니었지만 항상 뛰어난 품질을 유지하려고 했던 루드비히의 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19년 5월 9일, 루드비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간소하게 생을 마감하고 싶었던 그의 마지막 바람에 따라, 루드비히는 남은 개인 재산의 대부분을 비엔나 악우회(Society of the Viennese Friends of Music)에 기부하였습니다. 그의 무덤에는 그의 뜻대로 이름과 날짜만 간단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비엔나 시에서 루드비히를 기리는 명예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후터스트라세 시대
(1863~1985)



칼 후터스트라세가 뵈젠도르퍼를 운영하던 시기, 유럽은 정치적 불안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뵈젠도르퍼 피아노 공장의 작업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27년, 뵈젠도르퍼는 뵈젠도르퍼 Concert Grand와 Grand Upright 모델을 전시한 제네바 국제 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합니다. 1931년 칼 후터스트라세의 아들 볼프강(Wolfgang) 후터스트라세와 알렉산더(Alexander) 후터스트라세가 사업에 동참하였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Art of the Piano의 소속 장인이었고, 아버지가 운영하던 뵈젠도르퍼 공장과 해외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두 아들 모두 루드비히 뵈젠도르퍼처럼 비엔나의 문화 단체 및 예술가들과 폭넓은 교류를 맺고 다수의 음악 행사를 지원하였습니다. 뵈젠도르퍼의 사업은 경제 위기 이후 하락세를 보이면서 1933년 악기 생산량은 52대에 머물렀습니다. 1936년, 또 한 번의 성공을 거두고 BBC에서 최고의 그랜드 피아노로 선정되면서, 악기 생산량이 144대 수준으로 대폭 회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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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뵈젠도르퍼 시절의 피아노 운송

칼 후터스트라세는 1942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두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줍니다. 2차 세계대전 중, 목재를 보관하던 야적장이 공습을 받아 심한 피해를 입게 되고, 연합군이 비엔나를 점령하면서 무지크페어인의 뵈젠도르퍼 쇼룸에 전시된 피아노는 군인들에 의해 장작으로 사용되고 맙니다. 1953년, 뵈젠도르퍼는 창립 125주년을 맞았습니다. 이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Wilhelm Backhaus )가 피아노 업계에 대한 헌신과 기여를 인정받아 뵈젠도르퍼 링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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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뵈젠도르퍼, 기술 이사 프란츠 버거와 그의 아들 칼 게오르그(가운데), 칼 후터스트라세(왼쪽에 서 있음)

킴볼 인터내셔널
(1966~2001)


전쟁 이후 생산이 조금씩 증가하면서 1966년 연간 생산력은 100대 넘어섭니다. 이 즈음에서 유럽은 번영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세계 곳곳에 비엔나의 음악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고, 뵈젠도르퍼 피아노는 모든 대륙에 수출됩니다. 알렉산더 후터스트라세와 볼프강 후터스트라세는 루드비히와 마찬가지로 가족 안에서 후계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1966년 7월 1일, 인디애나 주 야스퍼 소재의 미국 기업 킴볼 인터내셔널(Kimball International)에 뵈젠도르퍼를 매각합니다.

1978년에는 무지크페어인 골든 홀에서 호르스트 슈타인(Horst Stein)이 지휘하는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갈라 콘서트로 뵈젠도르퍼 창립 150주년을 기념했습니다. 이때 파울 바두라스코다(Paul Badura-Skodais)에게 뵈젠도르퍼 링이 수여되고, 1977년 루빈스타인 콩쿠르, 1978년 텔아비브 콩쿠르를 석권한 독일의 젊은 피아니스트 게르하르트 오피츠(Gerhard Oppitz)가 비엔나에서 초연 공연을 올립니다.  또 뵈젠도르퍼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비엔나의 피아니스트 외르크 데무스(Jörg Demus), 알렉산더 제너(Alexander Jenner), 발터 클리엔(Walter Klien)이 브람스 홀에서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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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ert Grand 290 Imperial의 운송 상자 안에 서 있는 뵈젠도르퍼 장인들

비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
(1973)


킴볼은 젊고 야심찬 예술가를 지원한다는 전통을 지켰습니다. 매년 뵈젠도르퍼 장학금을 지급되고, 국제 베토벤 피아노 콩쿠르 1등 수상자에게 뵈젠도르퍼 Grand Piano 200을 기증하였습니다. 또한 비엔나 음악예술 대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열리는 뵈젠도르퍼 콩쿠르를 100년 넘게 지원해 오고 있습니다. 수요가 늘면서 뵈젠도르퍼는 1973년 그라프 슈타렘베르크 가쎄에서 비엔나 근교의 소도시인 비너 노이슈타트로 공장을 이전하였습니다. 같은 해 브루노 크라이스키 연방 총리가 선택한 Concert Grand opus 30.000이 공장에서 출고되어 일본으로 배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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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공항(VIE)에서 항공 운송 준비 중인 Concert Grand 290 Imperial 현재까지 제작된 그랜드 피아노 중 가장 큰 크기

1986년 11월, 뵈젠도르퍼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셀프 플레잉 Imperial 290 플레이어 그랜드 피아노를 처음으로 선보입니다. 이 피아노는 획기적인 깊이의 사운드와 정확한 녹음 품질로 어떤 음이든 가장 사실감있게 재현할 수 있는 당대 최초의 디지털 그랜드 피아노였습니다.

하지만 사업 운영에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킴볼은 2001년 오스트리아의 BAWAG-PSK 그룹에 뵈젠도르퍼를 매각합니다. 오스트리아 은행이 뵈젠도르퍼를 인수하면서 잠시 오스트리아 기업으로 소유자가 바뀌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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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하와 뵈젠도르퍼
(2008~현재)


2008년, 일본 기업 야마하가 뵈젠도르퍼를 인수합니다. 야마하는 뵈젠도르퍼가 유지해 온 전통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오스트리아에 소재한 뵈젠도르퍼 공장의 완전한 독립성을 보장해 주었고 지금까지도 계속 별도의 오스트리아 기업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구조 조정에 성공하고 음악 업계에서 경험과 실력을 쌓은 야마하를 통해 유통 경로를 넓히면서, 뵈젠도르퍼는 새로운 활력을 얻었습니다. 뵈젠도르퍼는 악기 판매 및 유통 분야에서는 야마하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지만, 뵈젠도르퍼의 모든 그랜드 피아노는 비너 노이슈타트에서 독점 생산됩니다. 뵈젠도르퍼는 처음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비엔나 근교의 작은 도시에서 연간 약 300대의 최고급 피아노를 수작업으로 생산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1828년부터 이어 온 그랜드 피아노 사운드


비엔나를 고향이라고 부르는 뵈젠도르퍼는 21세기에 어울리는 콘서트 악기를 개발하면서 아티스트와 그들의 상상력 사이를 가로막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하게 분출된 감정들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찾아 헤매던 것을 찾았고 완전히 새로운 VC(비엔나 콘서트) 기술을 개발하였습니다. 오랜 기간의 헌신과 노력, 인내, 그리고 비엔나의 피아노 제작 전통을 발전시켜 Concert Grand 280VC, Grand Piano 214VC, Grand Piano 185Vc를 설계하였습니다. 뵈젠도르퍼의 새로운 첨단 기술은 경이로운 음색 영역, 섬세하고 다이나믹한 반응성, 완벽한 액션을 결합했습니다. 일류 피아니스트가 원하는 모든 특성을 그랜드 피아노 하나에 담았습니다.

피아노 터치만으로 Art of Piano에 대한 뵈젠도르퍼의 절대적인 헌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뵈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의 독특한 사운드는 세대를 넘어 깊은 여운과 영감을 남길 것입니다

음악은 확실히 번역이 필요하지 않은 언어로, 인간이 즉시 이해할 수 있고, 하나가 된 순간에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삶의 요소를 위해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Mag.(FH) 사빈 그루뮬러

상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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